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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오드리 헵번, 기억의 숲

이경숙 기자| | 04/13 06:40 | 조회 17952

1943년, 벨기에 태생 14살 소녀는 전쟁을 피해 네덜란드 아른험으로 도망갔다. 전쟁은 곧 번졌다. 소녀는 이복오빠와 삼촌을 잃었다. 기차역에서 끌려가는 자기 또래 유대인 아이들을 봤다. 자투리 천으로 토슈즈를 만들어 신고 소녀는 마을극장 무대에 섰다. 춤을 춘 후 모자로 걷은 돈으로 가족의 생활비를 쓰고 일부는 레지스탕스 지원금으로 보냈다.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무너진 집의 지하실에 며칠 동안 숨어 있다가 가족에게 돌아갔을 때, 소녀는 빈혈과 황달로 빈사상태였다. 그때 그를 살린 것이 유니세프 전신인 유엔구제부흥사업국에서 보내준 구호상자였다.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로 20세기 대표 배우가 된 오드리 헵번은 1988년 이후 남은 생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보냈다. 콩고 오지에서 영화를 찍던 때 자신을 위한 에어컨과 비데가 설치된 임시캠프에서 잤던 대배우는 말년에 여행가방 두 개를 들고 전기도, 수도도 없는 기아의 현장을 누볐다. 그가 갔던 지역은 전염병지역부터 전장까지 20여국에 달했다.

그는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한달전, 유언을 남겼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로 시작하는 이 시는 지은 이 ‘샘 레벤슨’의 이름보다 말한 이의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 말은 사람보다는 나무를 닮았다. 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심긴 말은 열매처럼 때를 만나면 싹을 틔운다. 그의 가족은 오드리헵번어린이재단을 만들어 유언에 담긴 뜻을 이어가고 있다.

그들이 한국에 왔다. 오드리 헵번의 첫째 아들 션 헵번 페러와 아내, 다섯 명의 자녀다. 이들은 10일 전남 진도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팽목항으로부터 4.16km 떨어진 무궁화동산 부지다. 션은 “이 숲은 세월호 사건으로 상처 입은 모든 분들을 위한 숲”이라며 “온 국민이 서로를 위로하고 희생자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장소가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9일 서울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션은 '비정치성', '비이념성'을 강조했다. 그는 “저희 가족은 정치나 이념을 떠나서 가족으로써 이 자리에 왔다”며 “조사과정이나 정치, 가족들의 아픔을 떠나 편안한 안식처와 희망을 드리는 장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사고 후 정치 지향에 따라 둘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는 국내 여론을 의식한 듯한 발언이었다.

션은 세월호 소식을 언제 들었을 때 강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어떤 부모가 자식의 죽음에 준비되어 있겠는가"며 "어머니가 활동했던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일어나는 아이들의 죽음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이러한 재난이 발생한다면 차를 불태우고 돌을 던졌을 것"이라며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유가족 분들과 함께 시작하는 이 캠페인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미래에 이러한 일이 또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인권의 문제이다. 평등한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를 만드는데 우리의 활동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아내인 카린 호퍼 헵번 페러는 "엄마로써 이 아픔을 공감한다"고 했다. 카린은 "아이들을 잃은 부모님들께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며 "기억나겠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사회와 국가에 더 좋고 발전된 모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션과 가족은 지난해 5월 한국의 한 기업에 이메일을 보내 이 프로젝트를 제안한 후 1년 동안 기억의 숲 조성을 위해 노력했다. 이들은 미국의 사회적 책임 인증기관 비랩(B-Lab)을 통해 이 기업을 알게 됐다고 했다. 트래플래닛이다. 비랩의 비콥(B-corb) 인증을 받은 소셜벤처, 사회혁신기업이다.

트리플래닛의 활동에 ‘사회적’, ‘소셜’이라는 단어가 따라붙지만 이 업체는 어떤 이념이나 정치와 관련 없는 활동을 하는 기업이다. 설립 후 5년 동안 나무가 필요한 10개국 73곳에서 50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헵번 가족과 한국의 사회적기업 트리플래닛이 함께 하는 세월호 기억의 숲(sewolforest.org) 조성 프로젝트에는 12일까지 542명이 참가해 3740여만 원을 모았다. 앞으로 더 많은 돈이 모이면 그만큼 더 많이 은행나무가 심길 것이다. 작고 푸른 꽃보다 지기 전의 노란 낙엽이 더 아름다운 은행나무들은 이제 세월호 희생자들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징하게 됐다.

'정치나 이념을 떠나' 모이고 있는 그 마음은 션·카린 부부, 그들의 다섯 아이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유년기에 가족을 잃은 상처를 지닌 채 가족을 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했던 헵번이 유언에 담았던 마음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치유되어야 하며 무지로부터 교육 받아야 하고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 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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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캐슬란 페러, 카린 호퍼 헵번 페러, 션 헵번 페러(왼쪽부터)가 9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세월호 기억의 숲 조성 기자 간담회'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세월호 기억의 숲 조성 프로젝트'는 오드리 헵번의 첫째 아들 션 헵번이 트리플래닛에 제안으로 시작돼 세월호 사건의 희생자들을 영원히 기억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할 수 있는 숲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며 오는 10일부터 세월호 숲 조성 착공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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