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머니

 > 기사&칼럼 > 쿨머니
 

[우리가 보는 세상] 베테랑의 학력

이경숙 기자| | 09/07 06:59 | 조회 16578

image
류승완 감독이 5일 오후 교육부 주최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주관으로 열린 '진로레시피의 별별 진로콘서트'에서 학부모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이우기 작가, 사진제공=한국직업능력개발원
'베테랑'. 어떤 분야에 오랫동안 종사하여 기술이 뛰어나거나 노련한 사람을 뜻한다. 비슷한 말은 숙련자, 전문인. 어원인 프랑스어로는 고참병이나 노장 혹은 40대 운동선수를 가리킨다.

1973년생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이다. 스무 살 때 영화판에 뛰어들어 23년째 영화를 만들고 있다. 그의 영화 ‘베테랑’은 5일까지 1165만 명이 봤다. 개봉 32일만에 이룬 성과다.

그런 그가 일 년에 몇 번씩 받는다는 질문이 있다. 고졸자 학력으로 어떻게 성공하게 됐냐는 것이다. 5일 열린 '진로레시피 별별 진로콘서트'에서도 그 질문이 나왔다.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학부모와 자녀 200여명을 초청한 자리였다.

류 감독은 대답했다. "그런 질문이 없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나를 세우기 위해) 내 앞에 뭔가를 세우면 그것들이 무너질 때 나도 무너진다." 그가 말하는 '뭔가'란 학벌 같은 것들이다. 사회생활에선 흔히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기 어려울 때 어느 학교 출신, 어느 직장 소속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운다.

그러나 류 감독은 타이틀 없이 베테랑이 됐다. 지금의 삶을 일궜다. 그의 이름을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치면 결과에 '학력'이 나오지 않는다. 영화 제목과 수상 경력이 그의 프로필을 채운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10개월 후 아버지를 여의었다. 청소년기 내내 그는 낡은 필름을 틀어 화면이 지글거리는 동시영화관에서 영화를 봤다. ‘탈출구가 없던’ 스무살 청년은 독립영화협의회 필름워크숍에 갔다.

거기서 그는 스물세 살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자신이 딴 ‘고려대 졸업생’이라는 타이틀에 아랑곳없이 그를 선택했고, 아내가 됐다. 영화 ‘베테랑’ 제작사인 ‘외유내강’의 강혜정 대표다. 두 사람이 세 자녀를 낳고 천만 관객 영화를 낳는 과정에서 학벌이 한 역할은, 없다.

왜 우리 학부모들은 학력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지 못할까. 독일 노동연구기구(IZA)의 연구원, 귄터 슈미트는 한국의 학력주의가 ‘보험적 동기’에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이 높은 사회적 안정과 높은 임금을 보장하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란다. 시민단체 ‘오픈랩’이 번역해 2일 슬로우뉴스에 올린 이 논문은 페이스북으로만 1000번 넘게 공유되며 토론을 일으키고 있다.

슈미트는 학력주의가 한국 청년 실업의 근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직장 업무와 연결성이 떨어지는 학력은 사회적 낭비일 뿐 아니라 불평등을 양산한다는 것이다. 해법은 ‘사회안전망’ 보강. 슈미트는 “사회안전망이 튼실하다면 청년들은 구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image
이경숙 쿨머니팀장
이로운넷 공동대표


우리는 경제, 사회 변동성이 커지면서 한 번 취직하면 정년이 보장되는 ‘정주(定住) 노동시장’이 줄어들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대신 취업과 재교육, 퇴직이 반복되는 ‘이동 노동시장’이 커졌다. 진로콘서트 말미에 교육부의 문승태 진로교육정책과장은 "지금 직업의 90%가 20~30년 후 없어질 것"이라며 "변화하는 세계에 대처하는 적응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스웨덴과 독일이 교육-노동(직장)-복지의 삼각망을 구축해 비숙련자를 숙련자 즉 ‘베테랑’으로 키워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안전망이 있는 사회라면, 류 감독이 ‘그 학력으로 어찌 성공했냐’ 질문 받을 일은 더는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