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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망고 김치찌개 레시피

공정한 시장을 만드는 아이디어

이경숙 기자| | 04/04 07:30 | 조회 5183

어느 날, 소시지 김치찌개에 건망고를 썰어 넣었다. 입맛 없던 팔순노모는 “어떻게 끓였냐”며 밥 한 그릇을 비웠고, 입맛 까다로운 남편은 “의외인데”하며 별말 없이 국물까지 마셨다. 유통기한 임박 건망고를 처리하려던 꼼수가 우리집 대박 레시피를 낳았다.

이 건망고엔 사연이 있다.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Asia Fairtrade Network, AFN)는 2013년부터 필리핀 프레다재단에서 공정무역 건망고를 들여와 팔았다. 업력이 쌓이면서 수입, 판매 체제도 안정됐다. 매출도 9억여 원을 돌파해 10억 원 고지가 눈앞에 있었다. 근데 국내 유통업체 한 곳이 갑자기 입점을 철회했다. 자사 브랜드의 건망고가 생겼다는 이유였다. AFN 창고엔 건망고 1만여 통, 1억여 원어치가 쌓이게 됐다. AFN은 자력 갱생을 시도했다. 1900여명뿐이지만 자사 쇼핑몰 회원들 대상으로 판매 이벤트를 걸었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의 문도 두드려봤다. 역부족이었다.

안타까운 소문을 듣고 주변 조직들이 나섰다. 윤리적 소비 쇼핑몰 이로운몰 운영을 대행하는 쿠키쇼핑은 파워블로거인 문성실 쿠키쇼핑 이사와 함께 공동구매 이벤트로 25%를 팔았다. 아름다운가게, 페어트레이드코리아그루 등 다른 윤리적 쇼핑몰들도 거들었다. 발도르프대안학교 학부모들부터 아름다운커피·트립티·기아대책·카페티모르 등 공정무역 동료업체들, 서울시 사회적경제과·사회적경제지원센터·신나는조합·은평사회적경제허브까지 다양한 조직이 판매를 지원했다.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은 ‘마지막’ 남은 물량을 구매했다.

결과는 완판. 유통기한 한 달여를 앞둔 식품을 큰 손해 없이 처리했으니 이 이야기는 미담일까? 아름다운커피 소셜임팩트그룹의 한수정 그룹장은 “사실 이건 아름답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고 말한다. 갑작스런 입점 철회라는 아름답지 못한 유통업체의 행위가 발단이기 때문이다. 국제공정무역기구(FLO)는 판매자가 유통업체와 생산자에 구매를 요청할 땐 최소 6개월 전에 문서 형태로 확약하라고 권고한다. 그래야 생산자가 재고 걱정 없이 생산계획을 세울 수 있다.

많은 공정무역, 사회적기업들은 이 규칙을 지킨다. 지키지 않으면 정체성을 잃으니까. 그런데 '윤리적 소비'를 마케팅 수단으로 여기는 대형 유통업체들은 이 점을 이용하다가 자사 전략이 바뀌면 준비할 시간도 없이 '이별'을 통보한다. 낮은 마진으로 인한 경제성 재검토, 타 브랜드 입점, 심지어 자사 브랜드의 미투 제품 출시까지 '이별 사유'는 다양했다.

생산업체들은 버려져도 항의하기가 어렵다. 다른 상품까지 입점이 철회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사회적경제업체들만 겪을까? 물론, 아니다. 많은 소기업, 자영업자들이 다 겪는다. 그나마 사회적경제업체들은 명분이 있으니 사회에 도와달라 손 내밀 수 있지만, 일반 소기업들은 대형 거래체와 ‘큰 건’ 한 건만 잘못되어도 부도위기까지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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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경제부 차장
이로운넷 공동대표
공정무역에서 말하는 ‘정당한’ 가격이란, 사실상 정당한 인건비다. 이게 보장 안 되면 농민들은 생계비를 벌기 위해 아이들까지 망고 따는 데에 동원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학교 갈 시간, 책 읽을 시간이 없어 자기 미래에 투자하지 못한다. 최소한의 인건비가 보장되는 거래는 국내 업체 사이에서도 필요하다.

소비자가 거들 수 있다. 방법은 쉽다. 소기업 자사 쇼핑몰에 가 직접 구매하는 것이다. 소기업의 개인정보관리가 불안해 회원 가입은 싫다면 엔페이, 카카오페이 등 간편결제를 쓰면 된다. 수입산 공정무역 원리를 국내산 간편결제 툴과 결합하면, 꽤 괜찮은 공정시장의 레시피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의외로 맛깔난 망고 김치찌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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